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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 사진전 <한국의 굿>

김수남 사진전 <한국의 굿> ​2005.12.03 ~ 2006.03.01

1970년대부터 잊혀져가는 우리 기층문화의 기록에 몰두해온 김수남 씨는, 특히 한국 전역의 굿판을 기록하여 한국 무속사진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은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입니다.

그는 일본 호카이도 히가시카와 마치에서 제정한 일본 최고의 국제 사진 상인 히가시카와(東川)상을 수상하였으며 독일 베를린 시 주최 Shamanism now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개인전을 가진바 있습니다. 또한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특별 전시된 「한국의 책 100권」에 「한국의 굿」이 선정되어 출판되었습니다. 1988년부터는 1년에 6개월씩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찍고 있습니다.

김수남의 사진연작 <한국 굿>에 대한 생각[몇 가지 생각]

글 : 요헨 힐트만 (예술 비평가,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교수. 예술이론)

김수남은 사반세기를 한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샤머니즘의 의식들을 사진에 담았다. 관찰력과 지식과 사진의 역량을 지닌 그는 “한국 샤머니즘의 문화사”를 영상으로 창출해냈다.

서구 언어들이 오늘날 한국의 샤머니즘이라 일컫는 것은 한국의 전근대적 시골의 여성 문화들이다. 이 문화는 유교와 불교적 특징이 우세한 사회에서 구전 서사 전통과 고유한 종교를 지니고 있었다. 김수남의 사진 작업들은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사진집으로 출간되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위해 영어를 텍스트로 한 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김수남의 예술은 한국 샤머니즘과 전근대적 시골 여성 문화의 다양한 형상들을 넓은 대중의 의식 속에 들어서게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예술을 거론하겠다. 이에 대해서 묻자 김수남은 대답했다. “난 예술가가 아닙니다. 단지 좋은 기록 사진들을 찍으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정말이지 그에게서는 사진의 즉물성[객관성]이 우세하다. 그의 작업은 사진 기록이라는 전통에 서 있다. 이 전통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로는 독일의 예를 들어보면 1910년에서 1930년의 “시대의 얼굴”이라는 사진 작업을 한 아우구스트 잔더가 있고,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익명의 조각물들”이라는 사진들을 찍은 힐라와 베른트 베혀가 있다.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이라는 데 누가 논박할 것인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김수남 역시 자신이 예술 사진작가로 간주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세 예술가들 모두에게서 나는 사진의 역행을 경탄한다. 이 말은 그들의 사진이 (기록이든 예술작품이든) 제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을 주목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샤머니즘은 한국의 먼 옛날에서 증명할 수 있다. 신라 금관들은 샤머니즘적 우주론을 시사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왕릉에서 발견된 이 금관들은 기원 후 6세기의 것이다. 우리는 당시 샤머니즘이 어떤 형태로 실행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삼국시대”(326-663)에는 가장 높은 사회계급에서도 샤머니즘이 인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고려 왕조에서도 샤머니즘을 억압하지 않았다. 불교는 우리 시대 계산법으로 4세기에 한국에 도입되었는데, 자연정령과 산신들을 믿는 원시 종교의 지역마다 다른 관습과 형상들을 교체하거나 말살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불교 사원에는 산신들도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에 유교가 관철되면서 비로소 샤머니즘은 억압을 받게 되었고, 남녀 샤먼들은 이제 사회의 낮은 계급에 속하게 되었다. 17세기에 한국은 최초로 서구 종교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19세기 초에 와서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보고들은 경멸과 편견에 가득 차 있다.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노력에서 일본 군부는 식민지 지배 초기에 한국의 샤먼 의식들을 폭력적으로 폐지시켰고 여자 샤먼[무당]들을 체포했다.

1970년 남한에서는 서구 모델에 따라 지역의 산업화 과정이 도입되었다. 이른바 “새마을 운동”이라고 불리는 근대화의 파도 속에서 샤머니즘은 근대적 농업을 방해하는 미신으로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작가 송기숙은 1987년 이렇게 쓴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더불어 근대화의 물결이 일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서구문화 속에 묻히고 말았다. 우리가 여러 분야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제3세계’의 다른 나라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전통문화보다는 서구문화에 대해 더 많은 소양을 쌓았다.”(“미륵”, 프랑크푸르트 1987, 학고재 1997)

김수남은 이러한 발전에 결정적으로 대항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어려운 억압의 상황에서 한국 샤머니즘의 문화사를 위한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샤먼들이 의식과 훈장들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최근 한국에서 샤머니즘은 민속 축제라든가 예술 또는 관광 차원의 “이벤트”의 형식을 띠며 세련된 면모를 갖게 되었다. 때때로 샤먼들은 미디어의 스타가 되기도 했다. 김수남의 사진 작업은 그런 것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는 입무식[신내림굿]이라든가 일상생활의 원과 한을 푸는 실제적인 적용으로 우리를 이끈다. 한국 굿은 구체적인 동기, 보통은 대단히 고통스런 동기로 소급하며, 제례 의식은 그 동기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1929년 알프레드 되블린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집 “시대의 얼굴” 머리말에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농부의 전형들을 본다. 소규모 농사라는 형식이 오랫동안 일정한 안정성을 지녀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안정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집단은 오늘날에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폐쇄적인 가족을 본다(...).” (<시대의 얼굴>, 뮌헨 1929)

소규모 농사의 “폐쇄적 가족”은 오늘날 우리 독일 사회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소규모 농사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관광 경제라든가 환경주의적 특수 경제, 또는 승마용 말이라든가 그와 비슷한 것을 사육하는 경제와 결합되어 있다. “소농”의 전형적인 표정과 의상은 이제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들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을 오로지 농부의 삶이 잃어버린 형상들의 기념비로서만 간주하는 것은 너무 단순화시킨 견해이며, 내 생각에는 잘못된 견해이기도 하다.

내가 약 20년 전(1986년) 독일 문화 잡지 <흔적 Spuren>에 한국 굿의 흑백 사진 연작을 싣고자 한국에서 김수남과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이렇게 쓸 수 있었다. “이번 호에 실은 사진들은 한국의 샤먼 의식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의식이 오늘날 남한에서 어떻게 거행되고 있는가도 보여준다.” 2005년인 지금에는 그렇게 소박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물론 남한에는 샤먼 의식들이 거행된다. 그러나 국가의 급속한 산업화 및 그에 따른 대가족의 해체와 더불어 남한에서는 사회적 생활 관계에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전에 도시에서 그랬듯이 사람들이 머릿속에 갖고 있던 생활관에서도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한국 샤머니즘의 형태들 역시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남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수남의 사진 작업이 없었다면 한국 샤머니즘의 몇몇 형태들은 어쩌면 잊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결코 한국 굿이 잃어버린 형상들의 기념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굿” 4권 29쪽의 사진은 1981년 한국 동해안 수영포에서 열렸던 수망굿을 보여준다. 한 젊은 어부가 폭풍으로 익사했지만 사람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샤먼은 수탉과 쌀, 긴 대나무를 갖고 익사 영혼을 대나무에 단단히 묶은 옷 조각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그는 바다에 등을 돌리고 돌아섰고, 모두들 뭍에 있는 어부의 집으로 갔다. 샤먼 뒤를 망자의 형이 어부의 초상 사진을 들고 갔다. 초상은 젊은 어부의 표정에서 과감함을 보여준다. 이 사진이 사건을 영원화하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뜻한다. 즉 사진은 사건을 종결된 것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어부의 과감함은 과거의 일이다. 초상 사진은 기념비 즉 슬픔을 종결짓는 수단으로서의 대용물을 나타낸다. 김수남의 전체 사진 작업에는 이러한 기억의 차원은 결여되어 있다. 당연히 수망굿 사진에서도 그렇다. 김수남이 찍은 영상들은 샤머니즘의 제례적 형상들이 사라진 데 대해 우리를 위로하는 것으로 넘길 수 없다. 그의 사진들은 한국 샤머니즘의 종말을 문화사에서 극복된 단계로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랍게도 어떤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

김수남의 사진들은 동아시아에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두 가지 면에서 유럽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가령 2005년 베를린의 문화작업소에서와 같이 화랑의 벽들에서는 예술로 존재하며, 책들에서는 민속학적 기록들에 접근한다. 나는 김수남의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흑백 사진들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것들은 나를 매혹시킨다. 그것들은 나를 기록적인 관찰로부터 심미적 관찰로 몰기도 하고 또 그 반대로 몰기도 한다. 우리가 이 사진들을 실재한 한국 굿의 증거들로 본다면, 그것은 기록적인 가치를 위해서만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치는 기록에서만 얻는다. 즉 우리 눈앞에 갖고 있지만, 기록된 현실(한국 굿)은 멀어진 기록에서만 얻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진들을 그 자체를 위해 본다면, 심미적 가치 때문에 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치는 실재한 한국 굿과의 종속성을 입증하는 한에서 사진들이 지니는 사진으로서의 가치이다.

한국 굿은 샤먼(대개는 여성이다)의 도움을 받아 원과 한을 풀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해 정령과 신들을 부르려는 인간의 제의적인 시도이다. 어떤 의미에서 굿은 극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 부활절 미사가 극인 것과 같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극의 미학을 특별히 사랑한다. 우리 역사의 일부인 “서구적 근대”는 미학이 “극”의 종교적 목적과 무관하게 자율적인 특질로 고찰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예술은 미적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미적 고찰에는 국가적, 정치적, 종교적 고찰들 즉 예술 외적 원칙들이 섞여 들어가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김수남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나에게 늘 다시금 제기되는 물음이 있다.

한국 굿이 인간과 착한 정령과 신들을 만나도록 주문을 외워주는 존재가 바로 미학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앞에서 나는 1970년에 이른바 “새마을 운동”과 함께 한국의 지역 산업화 과정이 서구 모델에 따라 도입되었다고 말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 독재 치하에서 샤머니즘은 원시적인 민중문화의 미신의 표현으로 격하되었다. 샤머니즘의 역사단계와 자연 속의 성역에 대한 표상이 과학적?기술적 산업사회 단계를 통해 극복되었다고 단순화시켜 주장할 수 있다면, 과학 자신은, 극복되었으나 수천 년 세월의 샤머니즘 속에 얼마나 진리가 있는지 물을 수 없었던 한에서, 맹목적으로 샤머니즘과의 대립 속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과학자는 자신의 도구들이 사전에 공식화하지 못한 질문들을 제기할 수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질문의 도구들(아원자(亞元子) 입자들의 가속장치, 방사선 및 뢴트겐 망원경, 유전공학의 게놈 프로젝트 등)은 엄청나게 육중하다. 이 모든 과학적 결과들을 그려내는 것은 절망적이게도 도구적 이성이다. 자연과학들의 이러한 도구적 체제에 악령적 일상의 정령들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괴로움과 원과 한은 계속해서 해소를 요구하게 될 것이며, 인간의 지성은 자연과학이 답할 수 없다고 선언한 질문들을 계속 제기하게 될 것이다. 이 지속성은 사유이다. 절박하게 된 사유,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자연과학 저편의) 사유이다. 소명을 받은 무당은 전문화되지 않은 힘으로 이 일에 종사한다. 무당은 그것이 무엇인지 더 잘고 있을 수 있다. 비록 이 앎의 본질보다 정의하기 어려운 것은 없을지라도 말이다.

--- 김경연 역 ---

주요 경

1, 히가시카와(東川)상에 대하여 히가시카와(東川)상은 일본 호카이도 히가시카와 마치에서 제정한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사진작가에게 주는 국제 사진 상이다. 이 상은 전 세계 사진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작가상과 일본 국내작가에게 수여하는 국내작가상, 신인 작가상, 특별상이 있으며 전 세계의 유명 사진가들이 수상한바 있다.

김수남은 1995년 11회 히가시카와 상 해외작가상을 국내최초로 수상했다. 김수남은 1983년부터 사진집「한국의 굿」출판을 시작, 1993년에 전20권을 완간하였는데 이 작업을 인정받아 수상한 것이다. 그는 수상 기념 사진전을 히가시카와 문화 갤러리에서 가진바 있다.

2, 베를린 Schamaminnen in Korea 사진전에 관하여 독일 베를린 시는 2년에 한번씩 「아시아 태평양 주간」행사를 해오고 있다. 이 행사에는 주목(focus) 국가를 지정, 그 나라의 문화 예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2005년 올해에는 한국을 FOCUS 국가로 지정한바 있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베를린 시는 영화, 사진, 미술 패널 디스커션 등을 중심으로 Shamanism now라는 페스티벌을 열었다. 김수남은 이 행사에 초청받아 werkstatt der kulturen 갤러리에서 Schamaminnen in Korea(한국의 무당) 개인전을 열었다.

3,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2005년 푸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한국은 귀빈국으로 선정된바 있으며 이 도서전에 특별 전시될 「한국의 책 100권」에 「한국의 굿」이 선정되어 영어판「Gut,Korean shamanic Ritual」과 한글판 사진집「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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