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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태 사진전 <낙동강>

September 28, 2007

홍순태 사진전 <낙동강>

2007.09.28 ~ 2007.11.14

 

낙동강 (Nak Dong River)

 

역사 속의 낙동강


낙동강 유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경북 칠곡군 석적면 중동 일대에서 돌망치 등 구석기 유물과 울산시 울주군 서생의 빗살무늬 토기, 부산 영도 동삼동, 조대, 다대포 등지의 패총 등 다양한 신석기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역사시대에는 청동기, 철기 문화의 꽃을 피운 지역으로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로 이루어져 가야와 천년고도 신라가 군웅활거하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일본과의 교통, 무역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이었으며, 임진왜란과 6.25의 비극적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근래에 와서는 산업 발전의 대동맥으로서 역할은 물론 경제 발전의 기틀이고 수자원의 절대적인 보호지역이기도 하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 유역의 영남지방은 특히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 시대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대구, 영천, 경주 일대로 이곳은 대동강 유역을 제외하면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다. 철기 문화와 병행하여 삼한이 형성되는데 대체로 마한이 경기, 충청, 전라남도 지방을, 진한이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을, 진한과 변한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방을 각각 차지했다. 따라서 삼한 중 진한과 변한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역사의 터전을 잡았다(삼국지위지동이전). 진,변한조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 진한과 변한에는 24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따라서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의 잔한과 변한 지역은 상당한 수준의 철기시대를 맞게 된다. 동래지방의 제철유지 등이 철기시대의 역사를 설명한다. 또한 김해 등지의 김해식 토기와 사천, 진주, 고성, 밀양, 동해 등지의 패총, 지석묘, 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 철검 기타 철제 유물 등이 이를 입증한다.


김해 패총 등에서는 탄화 된 쌀이 나와 이미 저습한 충적 평야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특히 낙동강 하류 지역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어 해류 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비옥한 충적 평야와 이어져 있어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이런 삼한 사회에서 낙랑, 대방군으로부터 대륙의 금속 유물도 이 낙동강 유역을 통해서 수입되어 진한과 변한의 부락국가를 개방시켰고 상류지방의 웅국은 사벌국으로 추측된다. 사로국이 점차 이웃나라를 통합하여 갈 때 첫 번째 목표가 이 낙동강 유역이었고 상류지방을 상주, 하류지방을 하주라 일컫는 시기가 있었다. 낙동강 하류지방의 부락국가군을 변진 또는 가야지방이라고 했다. 이 지대는 후에 신라, 백제, 왜 등 세 나라의 각축장이 된다. 4세기까지 낙동강을 경계로 한 사로국은 강 서쪽의 대가야 등 비교적 큰 국가와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낙동강 유역의 신라의 핵심부분이 되어 이 일대를 바탕으로 1세기 뒤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삼국통일로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685년 새로운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 5소경 제도를 채택한다. 9주 가운데 옛 신라 및 가야의 땅인 낙동강 유역의 사벌주, 삽량주-지금의 양산, 강주-지금의 진주의 삼주로 나뉘었다. 낙동강 유역의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가 신라인데 반하여 이보다 앞서 순전히 낙동강 하류에서 이 강을 중심으로 산재하여 있던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이룩한 나라가 가야국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신라 진흥왕 때 이르러 신라에서 이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강은 수운이 편리하며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세미의 운송로가 되어 조창도 연안에 설치되었다. 또 남쪽 대마도와 일본과의 교통무역에도 이 수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인이 래조하여 상경하는 교통왕래로 처음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고 다시 한강을 내려가서 한성에 이르는 길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 뒤 상경로 연선의 역인이 입역에 핀곤하여 폐허가 생겼고 또 일본 선박의 삼포분박의 제도가 정해짐으로서 상경로도 지정되었다. 이 수로 왕래의 기점인 도요저는 그의 요진으로 관선을 갖추고 있었으나 세조 때에는 이곳이 삼포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강의 연선인 동래구 동원동에 따로 수참을 설치하여 김해, 양산의 공천을 참부로 사용하여 왜인의 왕래에 편익을 주었다. 그리하여 동원동은 그 뒤 왜인과의 무역상 요지가 되었다. 6.25 동란 때 남침해온 인민군들을 이 강에서 방어했고 9.28 수복의 시발점이 된 것도 이 낙동강이 가진 비극의 역사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의 삼척도호부 편에 ‘황지’의 서쪽으로 1백 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여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낙동강의 원류인 것이다. 물줄기가 시작된 1634곳의 발원지 중 과연 어느 곳이 최장 발원지일까? 1978년 김우관 교수가 낙동강 유역도 (축적 1:250,000 지형도) 상에서 수계차수를 찾아낸 것이다. 이 의문의 정답은 강의 길이를 측정하여 길고 짧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되는 지점을 기점으로 축적 1:25,000 지형도 상에서 곡선자로 그 길이를 비교하면 낙동강 최상류 일대의 1차수를 측정한 결과 천의봉이 합수에서 1312m 최장 발원지 (1차수)였다. 이 산은 지도상 1,442.3m로 표시되어 있는 무명봉으로 정상의 삼각점 표식을 국립지리원에서 확인한 결과 천의봉이라 하며 한국지리총람에도 ‘추천:천의봉 밑의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하천의 길이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인 하구에서 최장 1차수 간의 거리이다. 낙동강의 법정 하천인 ‘김해군 녹산면 녹산 배수문 우난으로부터 국도노선을 따라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을 연결하는 선’이라 한다. 513.5km이다. 황지에서는 황지를 낙동강의 발원지라 주장하기도 한다.

 

나의 낙동강에 대한 관점은 서울태생으로 영남 출신도 홍씨이니 신라통의 성씨도 아니다. 단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낙동강에 매료되어 60년대부터 기록했을 뿐이다. 도계, 철암, 황지, 장성, 태백준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안동, 상주, 봉화, 밀양을 거쳐 부산 하단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관습, 가옥 구조, 사찰, 장날의 인간상, 도시 인구집중 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줄어들어도 굳건히 조상으로부터 받은 토지를 사수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기록하려고 노력했으며 변화되지 않은 오리지널한 고유문화를 기록하여 후세에 영원히 남기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낙동강 변에 홍수가 나면 달려가고 겨울이 되어 낙동강이 결빙되면 달려가 강변 마을의 생활을 기록했다. 상주에서 가까운 낙동강변 마을에 낙동이라는 곳이 있다. 어쩐지 낙동강과 마을 이름이 같아 유심히 그곳을 관찰하고 촬영했으며 낙동 마을에서 강에서 잉어를 잡아 끓여주는 매운탕의 진미를 맛보기도 했다. 겨울철 강이 결빙되었을 때 얼음을 깨며 나룻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나아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더욱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안동의 하회마을이다. 영국의 여왕이 방문하기도 하여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근래에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부터는 고유미가 상실 된 관광화 되어버린 틀의 마을은 결코 하회의 제 모습이 아니었다. 60년대의 하회마을은 이씨조선의 참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현대화 된 그때의 모습을 모사한 도시적인 마을로 변하고 말았다. 그곳 마을의 인심까지도 그렇다. 당시에 유씨댁 종가집이나 형제의 집을 방문하면 반가이 맞아주며 며칠 묵고 가라고 붙들어 며칠씩 묵고 오기도 했었다. 대청마루에 누워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잠들었던 인심 좋던 하회마을은 이제 상업화로 인해 각박해져 인심 좋고 착한 종친들의 옛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낙동강은 단순히 자연경관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만이 아니라 물의 원천이요, 물은 인간의 희망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을 살찌게 한다. 수자원의 원천이기도 한 낙동강의 옛 모습을 본받아 낙동강의 고마움을 되새기기를 바란다.

 

 


행동하는 사진가, 실천하는 교수

한정식(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장)


문득 눈을 떠보니 어느 새인가 내 나이 환갑 진갑 다 지내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엊그젠가 육명심 교수가 정년이라는 통지가 오더니, 이제 다시 홍순태 교수가 학교 생활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삶이라는 게 덧없다는 것이 말로써가 아니라 실감으로 스민다.

 

내 사진 인생에는 홍 교수와 육 교수 두 사람이 은인으로 얽혀 있다. 내 사진의 문을 처음 열어 준 사람이 홍 교수요, 대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육 교수였다. 그 후 우리 셋은 교단에서 여러 가지로 얽히고 설키면서 사진 생활 30년, 교단 인생 20년을 함께 했다. 30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우정도 깊었지만, 그 우정만큼 갈등도 많았다. 그러나, 그 우정도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이제 저녁 노을처럼 지려 하고 있다. 저물녘에 돌이켜 보면 참으로 본받을 것 많고, 배울 점 많은 홍 교수였다는 생각이다. 부지런하고, 열의 가득하고, 그리고 그 강한 의욕, 거기에 성실성 등등….

 

홍 교수는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이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게 강건할 수가 없다. 탱크,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그는 밀어붙이는 힘에서도 남달랐다. 말하자면 몸의 사람이요,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사람이다. 그만큼 순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홍 교수는 그래서 계산이 빠르지 않다. 약삭빠르지도 못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하게, 때로 우직하게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의 사진이 그래서 그렇다. 그의 사 진치고 골치 아픈 것 하나 없다. 아예 골치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또 비슷해서 내게도 골치 아픈 사진 한 장도 없는데, 그나 나나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 뒤를 캐고, 모순에 고민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인 것이다. 그저 뚝심과 열정으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걸어가는 그인 것이다. 그의 사진이 언제나 조형성을 바탕으로 시각적 형태성을 중시하는 것도 그의 그 정직성과 성실성이 시각적 트럭이나 잔재주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있는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진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그의 성격적 바탕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상과대학을 나오고서도 사진으로 전향하여 나름대로 성공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직선적 사진으로 직결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사진이 해외로 나간 것도 그의 행동파적 성격에서 온 것이다. 불도저가 밀고 나가기에는 한반도가 좁아 터진 것이다. 탱크가 달려가기에는 걸리는 것도 많고, 부딪치는 것도 많고, 그뿐 아니라, 속력을 내기에는 터가 너무 비좁은 것이다. 좁은 방구석에서는 저절로 발이 문 밖으로 빠지듯 좁은 바닥에서 쩔쩔매던 그의 발이 해외로 빠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해외라 해서 한두 군데에 만족하는 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거실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고, 그가 간 곳, 가야 할 곳을 작은 깃발로 표시를 해 놓고 있다. 그의 욕심이야 전 세계의 정복이겠지만, 우선 백 개의 나라를 정복하겠다고 했다. 지금 몇 나라 째 정복을 했는지 모르지만, 거의 전 세계에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나라가 아마 한 군데도 남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경이적인 창작 활동은 무엇보다도 강한 의욕을 뒷받침하는 건강이 가져 온 것이지만, 이 건강도 부지런함이 없으면 부산한 발길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부지런함이 그의 오늘을 만든 것이라 해도 틀림이 없다는 뜻이다.

 

부지런하기로는 사진계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우리 홍 교수 만한 사람 찾기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가 근무하던 신구대학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는 교수가 바로 그라는 얘기를 듣고 있지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까지 부지런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 그인 것이다.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니,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것도 온통 사진 일로만 그렇게 바쁘고 부지런했으니, 20여 회에 이르는 개인전이 저절로 열린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타고난 건강이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거꾸로 그 부지런함이 건강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른다. 찍은 사진의 양도 많거니와, 소재로서도 관심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그는 기록했다. 사진의 온갖 조류에도 관심이 깊어 그런 온갖 조류의 사진도 조금씩은 다 손을 대본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선생으로서의 기질인 것이다. 그의 회갑 기념전 당시 썼던 글에서 잠시 밝힌 바도 있지만, 그는 타고난 선생이기도 하다. 누가 그에게 사진에 관해 물으면 자기가 아는 것 모두를 열심히 설명해 주는 사람이다. 사진 사조는 물론이요, 기계적 메커니즘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심 안 가진 것이 없고, 손 안댄 것이 없을 정도라, 거의 모든 물음에 서슴없이 답이 나오곤 했는데, 이것이 모두 그의 선생 기질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가 다루어 보지 않은 소재가 거의 없다는 것도, 사진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보인 그의 기질과 그대로 한 맥락인 것이다. 교수라고 해서 지시나 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모든 것을 직접 해 보고, 겪어 보고 그리고 나서 학생들 앞에서는 것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인 것이다.

 

아무튼, 힘차게 의욕적으로 밀어 온 사진 인생 40년이었다. 그가 정년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듯, 학교가 끝났다고 편히 쉴 그가 아니다. 편한 것이 미안해서가 아니라, 사진 찍고, 글 쓰고, 가르치고 하며 자기를 쉬지 않고 몰아가는 것이 이제는 그의 생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인은 전장에서 죽고, 선생은 교단에서 쓰러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모르긴 해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도 그는 카메라를 메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니, 저 세상에 가서도 카메라를 절대로 놓지 않을 사람이 바로 홍순태 교수 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http://www.kcaf.or.kr/art500/hongsoontai/main.htm 에서 발췌


사진가 홍 순 태

1934 서울출생

 

학력
196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개인전
1978 1회 외 다수

 

경력
1968 국전사진부 특선 3회, 금상 1회, 입선 2회
1970 엑스포 '70 한국관 사진담당
1972 국전추천작가
1972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1975)
1975 엑스포 '75 한국관 미래관 사진출품 30점
1980 국전초대작가
1881 신구전문대 사진학과교수(∼현재)
1983 KBS이산가족찾기 이벤트 사진촬영 담당 20,000매
1986 '86아시안게임 공식기록 사진가
1988 '88서울올림픽 공식기록 사진가
1988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강사(∼현재)
1989 사진예술지 편집주간(∼현재)
1993 엑스포 '93멀티비젼 총감독
1993 한국 민족사진가협의회 의장(∼96)
1994 한국사진학회 회장(∼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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