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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진 사진전 <사진촬영 멀고도 먼 길>

최인진 사진전 <사진촬영 멀고도 먼 길>

2008.11.21 ~ 2009.01.31

이 사진 전람회는 1862년 한양을 출발한 동지사 수행원들이 최초로 중국 북경에서 사진을 촬영했던 현장과 이들의 숙소 및 체류 행적, 압록강을 건너 요동 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연행노정을 추적하면서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했다.

작자는 2000년 이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1863년 중국 북경에서 사진을 촬영한 바 있는 이항억(李恒億)이 쓴 『연행초록』(燕行鈔錄)을 들여다보면서, ○ 이항억 등이 촬영했던 북경의 러시아관 위치와 당시에 촬영한 사진 속의 현장. ○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던 러시아동방정교회 전도단원 규명 ○ 1863년경의 중국 북경의 우리 연행사행 숙소. ○ 우리 사신들의 북경 행렬도 및 체류 중의 활동행적.

등과 아울러 압록강 도강, 중국의 첫 관문인 책문(柵門)에서 요양(遼陽)까지의 노정, 심양(沈陽)에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하북성(河北省)의 수양산(首陽山)과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유적지 등, 1백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의 연행노정은 어떠한 길이며, 어떻게 변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러시아인의 거주지였던 아라사관구지(俄羅斯關舊址) 등을 포함해 전 노정을 수차례나 답사했다.

이 작업은 연행사의 노정 답사가 아니라 최초로 사진과의 접촉을 밝히는데 있었지만, 답사 과정에서 연행사들의 노정을 꼼꼼히 되짚어보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잊혔던 노정, 우리에게 알려진 길과는 전혀 다른, 실제 노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863년 연행사들이 러시아인으로부터 촬영한 사진자료의 발굴이 있었으며, 중국에 입국해 도달한 책문(柵門)까지의 노정, 사신들마다 험준하다고 기록으로 남겼던 요동의 청석령(靑石嶺), 호랑곡((虎狼谷), 낭자산(娘子山) 등으로 이어지는 노정. 첫 번째 답사에서만 볼 수 있었고 도로공사로 길이 막혀 불 수 없었던 석문령(石門嶺) 길, 우리 사신들이 사행에서 빼놓지 않았던 정신적 숭앙 대상이었던 수양산(首陽山)과 이제(夷齊) 사당의 엄청난 변모 등을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답사에서 얻은 또 하나의 중요한 수확은, 러시아인들이 중국 북경에 정착하면서 거주했던 북관(北舘), 남관(南舘)의 구지(舊址)의 확인이었으며,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신들이 북경(北京)에 도착해 숙소로 이용했던 사역해동관(四譯會同舘) 옛터를, 북경시공안국(北京市公安局), 또는 우체국, 북경캐피털호텔 등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이 번 답사로, 천안문 광장 바로 옆, 옛 미국공사관 자리였음도 확인했다. 정양문 전문(正陽門前門) 동쪽, 천안문(天安門) 광장 남쪽 끝에 동쪽에 위치한 북경 전문동대가(北京 前門東大街) 23, 근현대 중요사적 및 대표적 건축으로 1995년 10월 20일 북경고적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1903년 청말 회동관(會同舘. 서상관(庶常舘)과 민간인 집을 헐고 1903년에 지은 공사관 건물은 옛 그대로 남아있어, 현재는 Beijing Center for the Arts(北京時間當代藝術中心)이라는 이름의 미술관, Ristorante Saldler 라는이탈리아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국토 개조와 이에 따른 공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난 번 보았던 노정은 다음에 가보면 새로 바뀌어 있음도 실감할 수 있었으며, 사신들이 극찬했던 지역은 아무리 찾아도 사라져 없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곳도 많았다.

사진이 유럽에서 발행된 것은 1839년, 실용화 된 것은 1840년 이후로, 세계 각지로 전파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접촉은 국내가 아니라 1863년 중국 북경에 파견되었던 연행사 일행 중의 이항억, 박명홍, 오상준, 역관 수십 명에 의해서였으며, 사진촬영은 북경 러시아정교회 전도단과의 접촉에 의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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